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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내륙 교통의 중심, 하천 수상교통
[특별기고] 이상배 박사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위원)

  2009년 01월 02일 (금) 14:51 양평매일뉴스  

오늘날은 고속도로와 같은 도로망이 잘 갖추어져 있고, 자동차․비행기․기차 등 교통수단이 발달하여 국내 내륙의 구석구석까지 손쉽게 접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까운 동아시아 지역도 1일 생활권의 범주에 있는 실정이다. 오히려 교통의 혼잡이 사회문제로 대두될 지경이다.

 

그러나 전근대사회인 조선시대의 내륙교통은 말을 이용한 육상교통과 배를 이용한 수상교통으로 크게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육상교통에서 말은 파발(擺撥)과 같이 국가의 중대한 연락사항을 전달하는 경우가 아니면 양반들과 같은 특권층에게서만 이용될 수 있었다. 따라서 대다수 일반인들은 머리와 등에 짐을 이고지고 울퉁불퉁한 도로를 두 다리에 의존하여 목적지를 왕래하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많은 양의 물적(物的)․인적(人的) 왕래는 물길을 이용하는 것이 보다 수월하였다.

 

조선시대 수상교통의 중심은 하남시와 인접해 흐르는 한강이다. 일찍이 조선시대 한양을 도읍지로 추천한 좌의정 조준(趙浚)은 ‘사방으로 통하는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가 통할 수 있으니 영구히 도읍으로 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합치된다’고 할 정도로 수도의 입지조건 가운데 하나로 수상교통이 편리한 점을 부각하였다.

 

한반도 내륙의 중앙부를 동에서 서로 관통하는 한강은 내륙지방에서 생산되는 물산과 해안에서 생산되는 물산이 상호 교류되는 교통로였다. 즉 서울에서 필요한 각종 물자와 강원도․충청도 내륙지역에서 필요한 물자들이 서로 교환되는 상품의 수상교통로로서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보다 구체적으로 한양의 궁궐과 관아건물, 그리고 관리들의 집을 짓는데 필요한 목재는 강원도와 충청도의 산간지역에서 채취되어 뗏목으로 만들어져 한강 물길을 통해 서울의 두뭇개(현재의 동호대교 북단)로 운송되었고, 조선시대 도자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백토는 강원도 양구에서 출토되어 뱃길을 다라 광주 분원으로 운송되었다.

 

뿐만 아니라 내륙 산간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소금이나 각종 생선과 젓갈류 등은 바닷길을 통해 한강 하류로 들어와 서울의 마포나루로 운송되었고, 이것을 내륙의 물건을 싣고 서울에 왔던 배들이 돌아가면서 소금과 생선류를 싣고 올라가 운송되어 산간 내륙지역의 경제적 불충분 요소를 충족시켜 주었다.

 

한강의 수상교통을 통해 운송되는 물품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미곡(米穀)이었다. 조선시대는 전국에서 조세를 거두어 육로와 수로를 이용하여 서울로 운송하였다. 그런데 운송에 있어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운송시간․1회당 운송량․노동력․운송비용․안정성 등이 종합적으로 계산되어야만 했다.

 

육상을 이용할 경우 말이나 소에 달구지를 매어 운송해야 하기 때문에 세곡을 실을 수 있는 양이 너무 적었을 뿐만 아니라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많은 불편이 따름은 물론 운송시간도 너무 지체되어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었다.

 

반면에 물길을 이용할 경우에는 큰 배를 이용하기 때문에 수송량이나 노동력 및 운송시간 등에 있어서 육로를 이용할 경우 보다 여건이 좋았다. 다만 안정성면에 있어서는 배가 침몰할 경우가 있어서 육로보다는 못하였다. 결국 조선시대 세곡운송에는 물길을 주로 이용하였고, 이것을 조운(漕運)이라 하였다.

 

조운이란 해운(海運), 수운(水運), 선운(船運)이라고도 하며 국가가 조세로서 징수한 세곡을 선박에 실어 운송하는 제도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세곡의 수송을 위하여 각 고을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을 창고에 모아 두었다가 물길이 닿는 곳으로 이송한 후 정해진 시기에 세곡운반선인 조선(漕船)에 실어 용산의 풍저창(豊儲倉)과 같은 중앙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였다.

 

이 때 원활한 조운을 위하여 출발지점, 기항지점, 도착지점이 있었는데, 이 3개 지점을 잇는 선이 조운로(漕運路)이며, 출발지점에 설치한 창고가 조창(漕倉)이었다. 충주의 가흥창(可興倉), 원주의 흥원창(興原倉), 춘천의 소양강창(昭陽江倉) 등이 대표적인 조창이다. 양평군에도 이러한 목적의 창고가 있었는데 갈산리의 전창(前倉)과 미원(迷源)의 북창(北倉)이 바로 그것이다.

 

나아가 사람들의 이동도 배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일찍이 한강은 낙동강과 아울러 한반도를 뚫고 조선시대 최대의 생산지인 경상도 지방과 최대의 소비지인 서울을 연결하는 대동맥이었다. 한강 유역에는 광주․여주․충주․원주․춘천 등 대도회지가 발달하고 있어 사람들의 왕래도 한강의 물길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춘천은 옛 맥국(貊國)이 도읍했다는 곳으로, 북한강의 줄기인 소양강이 도회지의 복판으로 흘러가므로 땅이 기름져 조선시대에 있어서도 사대부들이 여러 대에 걸쳐 많이 살았다.

 

그리고 여주는 남한강변에 위치하고 한양과 100리 거리에 있는데, 지세와 기후가 좋아 양반들의 별장이 곳곳에 있고, 사대부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가까이에 이천․읍죽․양평 등의 고을이 있어 역시 한강의 물길이 즐겨 쓰이고 있었다. 그 밖에 충주와 원주도 각기 관아가 있었던 곳으로서 물산이 풍부하고 수운에 의해 서울과 교통이 손쉬워 사대부들 중에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한강을 끼고 있는 고을 중에 남한강과 북한강을 동시에 접하고 있는 고을이 바로 양평이다.

 

조선시대 광주부의 속현이었던 양평도 많은 나루가 있어 남한강과 북한강을 건너 사람들과 물류가 통행하였다. 특히 조선 말 나라가 혼란스러워 전국에서 의병이 창궐하였을 때 남한강과 북한강은 정보를 주고받는 창구역할을 하였다. 의병운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위정척사사상의 정점에 있던 화서 이항로선생이 서종면 한강가에 칩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춘천의 유인석 의병군이나 지평 일대의 이인영의병장 등이 배를 이용하여 한강을 따라 서로 정보를 주고 받으면서 활동하였다는 점에서 한강은 우리에게다양한 의미를 전달해 주고 있다.

 

이러한 역사성을 간직하고 오늘도 유유히 흐르는 한강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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